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반 투르게네프 (문단 편집) == 생애 == 러시아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 출신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뒤, [[알렉산드르 푸시킨]] , [[니콜라이 고골]] 등 대표적인 러시아 진보 지식인들을 만난 후 '서구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인 <[[첫사랑(소설)|첫사랑]]>, <루딘>[* 현실의 변혁을 바라는 이상주의자이지만 막상 현실의 행동에서는 무력감을 나타내는 1840년대 '나약한 지식인' 루딘을 그린 소설. 중국의 문호 [[루쉰]]의 필명도 본작의 루딘의 이름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http://bookcosmos.mk.co.kr/Sub/Digest/GuideBook.Asp?book_sno=5050025|*]]] 등의 소설은 세련된 필체와 묘사로 유명하다. 중년기 이 후에는 [[로마노프 왕조]]의 구체제에 반대하는 소설을 다수 썼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투르게네프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한다. 세르게이는 자신의 아버지(즉 이반의 할아버지) 니콜라이가 빚을 갚지 못해서 채권자 감옥에 끌려갈 상황이 되자 니콜라이는 아들 세르게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면서 제발 잘생긴 외모를 이용해서 부자 여성과 결혼해 자신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결국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긴 세르게이는 자신보다 7살 연상이던 부잣집 유산을 홀로 다 물려받았던 (후에 이반의 어머니가 되는) 바르바라 페트로브나 루토비노바와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이반을 낳았다. 이러한 가정사는 투르게네프의 소설인 첫사랑에서도 반영됐다. 어릴적의 투르게네프는 기병 장교였던 아버지가 계속 외도와 도박을 하며 집 밖을 돌아다니다가 일찍 죽고 난 뒤, 오렐 지방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유산을 홀로 다 물려받았던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다. 투르게네프의 어머니는 [[프랑스인]]과 [[독일인]] 가정교사를 불러와 투르게네프를 가르치게 했고 [[프랑스어]]로 말하게 했다.[* 러시아의 귀족 가문들은 대부분 이렇게 자녀를 양육했다. 외국인 가정 교사를 불러와 서구식으로 가르쳤으며 프랑스어로 말하게 하고 러시아어는 쓰지 못하게 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도 자녀가 러시아어로 말하는 것을 프랑스어로 교정해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톨스토이 본인도 학교로 가기 전까지는 [[푸쉬킨]]의 시를 몇 편 읽은 것 외에는 러시아 문학을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일상 생활에서도 프랑스어를 써야 했고 신에게 바치는 기도도 프랑스어로 해야 했다. 반면에 [[러시아어]]는 농노 하인에게서 배웠고 러시아어로 된 책은 8살 때 잠겨있던 러시아어 책이 있는 방에 몰래 들어가 처음 봤다. 그가 러시아의 대문호로 날리게 되는 미래를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가 따로 없었다. 투르게네프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은 러시아 농노 문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대지주였던 그의 어머니는[* 그녀의 대농장은 자신을 학대하던 의붓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것이었다.] 농장을 관리하면서 사소한 잘못에도 체벌을 가하고 [[시베리아]]로 보내버릴 정도로 농노들을 무자비하게 징벌했다. 그리고 그녀는 농노들을 마구 후려쳤던 채찍으로 아들도 함께 때렸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들어온 의붓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으나 의붓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막대한 유산을 홀로 다 물려받았다. 부자가 된 그녀는 당대 최고의 인기인과 결혼했지만 그렇게 얻은 남편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며 외도를 밥 먹듯이 하고, 결국 그녀는 자신에게 쌓였던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를 아들들이나 농노들을 학대하면서 대리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어릴 적부터 이런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반감을 가졌고 1850년에 어머니가 죽자마자 물려받은 농노 약 천 명(혹은 5천 명 이상)을 해방시켰다. 투르게네프의 이러한 행동은 러시아 귀족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다만 정부에게 '사회 전복의 가능성이 있는 요주의 인물'로 찍힌 부정적인 의미였다. 농노들을 그저 해방만 한게 아니라, 어느 정도 재산도 쥐어지고 몇몇 농노들이 일꾼이라도 일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면 받아줘서 언제라도 그만두고 마음대로 나가게 할 자유민 일꾼으로서 농장에서 일하게끔 했다. 이런 일꾼들에게도 매우 잘 대해줘서 이들은 투르게네프가 죽을때까지 농장에서 착실하게 일했다고 한다. 농노를 해방하고 몇 년 후에 발표한 <사냥꾼의 수기>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여행기 양식을 빌은 책으로 러시아뿐 아니라 서구권까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러시아 식자층 사이에서는 농노 역시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을 환기시켰고, 책이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유럽 각지에 당대 러시아 농노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렸다. 심지어 당국이 이 책 때문에[* 명목은 극작가 [[고골]]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 불순한 내용을 적었다고 잡혔지만 시기도 그렇고 정황도 딱. 거기다 정부는 <사냥꾼의 수기>의 출판을 허가한 검열관도 잘랐다.] 그를 체포, 감금할 때, 러시아 전역에서 반대 여론이 거세게 들고 일어났을 정도. 투르게네프가 체포당할 당시 '대체 뭔 내용이길래 난리야?'하고 놀란 대중들에 의해 사냥꾼의 수기 초판이 순식간에 매진되면서 다시 금서로 지정하는 일마저 불가능해졌다. 금새 매진된 책이 재판을 거듭하면서 농노제 폐지 여론에 힘을 더해주었고 결국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 출간은 1861년 2월에 농노 해방령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당시 농노 해방은 농노들의 의견은 배제하고 러시아 황실과 기득권층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정책이라는 한계가 있어서, 명목상으로는 해방이었지만 농민들은 원래 토지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토지 상환금을 분할 지불해야 했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불완전한 농노 해방을 단행한 것 때문에 귀족과 농민 양측으로부터 불만을 샀고, 과격단체의 폭탄 공격으로 끔찍하게 죽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상황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알렉산드르 2세]] 항목 참조.] 결국 러시아 정부의 지속적인 압박에 질려서 출국한 투르게네프는 이후 [[파리(프랑스)|파리]]에 살면서 러시아 농노제를 반대하는 각종 작품을 발표하여 서구권과 러시아의 인텔리로부터는 찬사를, 정부로부터는 공갈협박을 받았다. 이후 1883년 연인이던 비아르도 부인의 별장에 있는 별저에서 병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